Inner View

브랜드의 본질을 읽고,
세상에 번역하다

답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질문을 듣는 사람

최성희 Kelita & Co. 대표

생활미술과 1994졸

모두가 비슷한 것을 보고 소비하는 시대에도 오래도록 사랑받는 브랜드는 본질을 잃지 않는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브랜드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유도 브랜드가 지닌 고유한 정체성에 있다. 최성희 Kelita & Co. 대표는 브랜드의 본질을 발견하고 세상에 전달하는 디자이너다. 그는 자신을 창조자가 아닌 ‘통역사’라고 정의한다. 대상이 가진 역사와 철학, 사람들의 마음속 가치를 읽어내고 이를 가장 적절한 시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최근에는 이화 창립 140주년 엠블럼과 슬로건 디자인을 맡아 모교의 역사와 미래를 하나의 상징 안에 담아냈다.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탐구하는 힘, 자연으로부터 배운 삶의 지혜, 그리고 후배들을 향한 진심 어린 응원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구성원들의 생각, 브랜드가 가진 온도, 

대중의 시선 등 모든 것이 디자인 재료가 됩니다. 

그 관찰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게 되면 거기서부터 

좋은 디자인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이화의 과거와 미래를 하나의 상징 안에 담아낸 이화 창립 140주년 엠블럼. 사각형, 삼각형, 구형의 서로 다른 형태들이 이룬 조화와 기하학적 구조가 핵심이다. 숫자 ‘0’에 적용된 구 형태와 그라데이션 색채에는 140년 동안 축적된 이화의 서사와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동시에, 끊임없이 연결되고 순환하며 세계로 확장되는 이화의 미래성이 담겨 있다.

창립 140주년 기념 엠블럼과 슬로건 디자인을 맡아주셨습니다.

이화는 모교이기도 하지만 약 16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던 곳이기도 합니다. 무려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화의 사계절을 온전히 바라보며 다녔던 셈이죠.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처음 고민하게 해 준 고향과 같은 곳이기에, 이번 140주년 작업 의뢰를 받았을 때 감회가 정말 새로웠습니다. 막중한 책임감과 걱정도 앞섰지만, 동시에 디자이너로서 30년 넘게 현장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준 모교를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렘이 더 컸습니다. 

사실 이화의 오랜 상징인 ‘배꽃’에서 벗어나는 것은 쉬운 도전이 아니었습니다. 최종 엠블럼이 나오기 전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배꽃을 그렸죠. 하지만 학교가 가진 시간의 깊이만큼 앞으로 펼쳐질 미래와 확장될 이미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엠블럼의 숫자 ‘140’을 자세히 보면 ‘1’은 사각형, ‘4’는 삼각형, ‘0’은 구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서로 다른 형태들이 이룬 조화와 기하학적 구조가 핵심입니다. 특히 숫자 ‘0’에 해당하는 구 형태와 그라데이션 색채에는 지난 140년 동안 축적된 이화의 서사와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는 동시에, 끊임없이 연결되고 순환하며 세계로 확장되는 이화의 미래성이 담겨 있습니다.

수많은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오셨는데, 본인의 아이덴티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많은 분들이 저를 크리에이터 혹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고 부르지만, 제가 생각하는 역할은 ‘통역사’에 가깝습니다. 저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브랜드, 제품, 조직 등 아이덴티티를 표현해야 하는 대상을 깊이 관찰하는 것이 제 일의 시작입니다. 구성원들의 생각, 브랜드가 가진 온도, 대중의 시선 등 모든 것이 디자인 재료가 됩니다. 그 관찰 속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게 되면 거기서부터 좋은 디자인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그럴듯한 이유로는 고객을 설득할 수 없어요. 브랜드의 본질적인 요소를 발견해 더 쉽게, 더 아름답게, 비즈니스적으로 도움이 되게끔 저만의 시각 언어로 번역해 전달하죠. 그렇기에 원본(본질)이 없다면 제 결과물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업이 있다면요?

좋아하는 것과 관심 있는 분야를 선택해서 일을 해요. 그래야만 제대로 관찰하고 진심으로 잘 할 수 있기 때문인데,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 맛있는 것, 그리고 로컬에 관심이 많아요. 그런 의미에서 ‘서울공예박물관’과 대전 ‘성심당’, 부산 ‘모모스커피’를 꼽고 싶어요. 서울공예박물관은 학창 시절을 보낸 안국동에 생긴 곳이에요. 매일 돌담길을 걸으며 사계절을 느끼던 골목이었는데, 거기에 의미 있는 박물관이 생긴다고 하니 이건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오랜 역사 속에 지역 문화와 재료들이 손에서 손으로 이어진 공예를 사랑하는 디자이너로서 그 가치를 진정성 있게 담아낼 수 있는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싶었어요. 

요즘은 어느 도시에 가든 똑같은 브랜드와 똑같은 제품을 만나는 글로벌 시대잖아요.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자산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면 답은 ‘로컬’에 있어요. 그 지역에 가야만 누릴 수 있는 고유함이죠. 성심당이나 모모스 커피 같은 브랜드의 공통점은 ‘특별함을 모두와 함께 나누고 싶다’는 간절하고 진정성 있는 마음이에요. 그분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보면서 제가 더 많이 배우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커리어 여정의 출발점에는 ‘종이’를 좋아한다는 명확한 취향이 있었다고요?

어릴 때부터 편지지, 포장지, 광고 전단 등 종이만 보면 모으고 버리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작업실에는 저와 함께 나이 들어가는 빛바랜 종이와 책들이 가득합니다. 디지털 데이터와 달리 종이는 아름답게 에이징(Aging)이 되거든요. 빈 종이를 앞에 두고 있으면 꼭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무한한 상상이 펼쳐져요.

종이에서 파생되어 패키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패키지 디자인 때문에 향수를 모으다 보니 향의 본고장인 프랑스 그라스(Grasse)까지 찾아가 향수의 원료를 공부하게 되더군요. 좋아하는 것 하나를 깊이 파고들면 무궁무진한 세계와 여정으로 연결됩니다.

지금은 미디어가 너무 발달해서, 나를 바라보는 시간보다 SNS를 통해 남을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아진 것이 저로서는 불편합니다. 남들의 화려하고 특별한 단면만 모아서 나의 결핍과 비교하다 보니 스스로를 다그치게 되죠. 그래서 저는 ‘혼자 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사물과 나 사이에 끼어 있는 불안과 소음이라는 필터를 걷어내고 투명하게 마주해야 오롯이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연을 가꾸며 어떤 삶의 지혜를 얻으시나요?

저는 씨앗(종자)에 매료되어 있어요. 그 작은 알맹이 하나에 엄청난 유전 정보가 담겨 있어, 보관했다가 심어도 싹을 틔우는 게 감격스럽습니다. 식물은 ‘자기 자리’와 ‘제 때’를 정확히 알아요. 음지 식물은 음지에, 양지 식물은 양지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게 꽃을 피우고, 추운 겨울에는 땅속에서 에너지를 비축하며 때를 기다리죠. 각자 고유의 꼴대로 살아가는 식물을 보며 회사를 이끄는 대표로서, 또 부모로서 ‘가만히 두고 관찰하는 법’을 배워요. 묶어두거나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가만히 뒀을 때 뭘 하는가를 보면서 본성에 맞는 환경만 만들어준 뒤 슬며시 빠져주는 것, 그것이 자연이 주는 지혜입니다.

이화의 후배들과 함께 나누고픈 이야기가 있다면요.

대학 시절의 저는 그리 도드라지는 학생은 아니었어요. 화실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돈을 모아 방학엔 기회가 되는대로 해외로 떠났습니다. 정보가 부족했던 시절이라 새로운 도시의 서점, 시장, 마트, 자연을 보며 얻은 생생한 자극들이 너무나 새롭고 소중한 자산이 되었어요. 4학년 때 교수님 추천으로 광고회사 인턴십을 마치고 입사한 첫 직장(LG애드)에서 7년간 디자이너로서의 업을 단단하게 다졌습니다. 이화에서의 학창시절이 없었다면 지금 디자이너로 살고 있을까, 생각하곤 해요. 삶의 유의미한 접점들을 이화에서 만난 것 같아요.

학생들에게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남들의 속도에 내가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 빨리 달리다 보면 결국 쓰러지거나 멈추어야 하니까요. 자기 속도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삶이면 충분합니다.

‘혼자 하는 시간’을 가질 것을 추천합니다.

사물과 나 사이에 끼어 있는

불안과 소음이라는 필터를 걷어내고 투명하게 

마주해야 오롯이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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