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ha Medical News
이화 140년, ‘사람’을 살리는 정신은 계속된다
유경하 의료원장이 말하는 이화의 길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 보구녀관의 문이 열린 지 139년. 여성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의료로 시작된 이화의 정신은 이제 첨단의료와 필수의료를 선도하는 이화의료원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경하 의료원장은 그 역사의 연장선 위에서 이화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한다.
| “ | 잘 치료하는 병원이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화가 왜 시작됐는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를 기억하는 병원이어야 합니다.” 유경하 이화여자대학교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 |
1887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 보구녀관의 문이 열린 지 139년. 여성과 소외된 이웃을 위한 의료로 시작된 이화의 정신은 이제 첨단의료와 필수의료를 선도하는 이화의료원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유경하 의료원장은 그 역사의 연장선 위에서 이화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한다.
여성을 위한 의료에서 여성 리더십의 역사로
이화의 역사는 늘 ‘최초’의 역사였다. 여성 환자를 위한 최초의 병원인 보구녀관, 여성 의료인 양성의 산실이 된 간호교육, 그리고 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뿌리가 된 조선여자의학강습소까지.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길을 가장 먼저 열어온 것이 이화였다.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유경하 의료원장은 대한병원협회 역사상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이를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이화가 오랫동안 만들어 온 여성 리더십의 결실이라고 설명한다.
“여성 병원장이 많지 않았던 시절부터 이화는 여성 리더를 길러냈습니다. 지금도 교수진의 약 60%가 여성입니다. 여성 의료진이 중심이 되어 대학병원을 이끌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화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한 성별의 의미가 아니다. 다양성과 포용성, 그리고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리더십의 가능성이다.
위기의 순간마다 빛난 설립 정신
유 원장이 의료원장으로 취임한 직후,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됐다. 개원 초기 단계였던 이대서울병원에는 결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저하지 않고 코로나19 거점병원 역할을 맡으며 국가적 위기 극복에 동참했다. “우리 구성원들이 힘들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보구녀관의 정신을 생각했습니다. 어려운 환자를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화가 걸어온 길이니까요.”
2024년 의료계 위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공의 공백으로 많은 병원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도 이화의료원은 병동을 닫지 않았다. 환자를 포기하지 않았고, 구성원들은 서로의 자리를 지키며 의료 현장을 지켜냈다. 유 의료원장은 이를 ‘기적 같은 성장’이라고 표현한다. “위기는 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교직원들이 있었습니다. 결국 병원을 움직이는 것은 사람이고, 그 바탕에는 보구녀관에서 시작한 섬김의 정신이 있었습니다.”
이대서울병원에 최근 조성된 ‘이화책방’. 환자를 잘 치료하는 것을 넘어 위로와 회복의 경험을 전하는 ‘사람 냄새 나는 병원’을 꿈꾼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 필수의료를 선택하다
이화의료원의 성장은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의료기관이 수익성이 높은 분야에 집중할 때, 이화는 필수의료 분야를 선택했다. 대동맥혈관병원, 뇌혈관 진료체계, 엄마아기병원, 혈액암병원 등은 모두 쉽지 않은 분야들이다. 응급환자가 많고 위험 부담도 크다. 그러나 생명을 살리는 데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특히 대동맥혈관병원은 전국 환자의 3분의 1을 진료하는 대표 센터로 성장했다. 엄마아기병원은 보구녀관과 모자보건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모델로 자리 잡았다.
유 의료원장은 이를 거창한 전략의 결과라고 말하지 않는다. “계획적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필수의료 분야로 가게 됐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 역시 이화가 140년 동안 걸어온 길과 다르지 않았다.
잊혀진 역사를 다시 세우다
최근 유 의료원장이 가장 열정을 쏟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조선여자의학강습소의 역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이다. 1928년 설립된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중요한 출발점이었지만 오랫동안 충분한 조명을 받지 못했다. 유 의료원장은 이화 창립 140주년을 맞아 이 역사를 널리 알리고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화 구성원들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들이 이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여성 의학교육의 시작을 위해 헌신했던 선배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는 병원 앞 공간에 역사 조형물을 설치하고, QR코드를 통해 누구나 쉽게 이 역사 콘텐츠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140년의 역사를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자산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다.
사람 냄새 나는 병원
유 의료원장이 생각하는 좋은 병원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환자를 가장 잘 치료하는 병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교직원들이 꿈을 꾸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병원이어야 합니다.”
최신 의료 장비와 첨단기술은 기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환자가 병원에서 위로받고 회복할 수 있는 공간, 직원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일할 수 있는 조직 문화 역시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대서울병원에는 예술 작품과 역사 공간, 휴식 공간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치료뿐 아니라 회복과 치유까지 생각하는 병원을 만들기 위해서다.
이대서울병원 보구녀관 앞에 조성된 조선여자의학강습소 홍보 공간.
유경하 의료원장은 한국 여성 의학교육의 출발점인 이 역사를 발굴하고 널리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보구녀관을 세운 이들은 가난한 여성과 소외된 이웃을 위해 낯선 땅에서 헌신했다. 그들의 정신은 여성 의료인 양성으로 이어졌고, 대학과 병원을 세웠으며, 오늘날 필수의료를 책임지는 이화의료원의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139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품는 이화의 정신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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