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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해석학:
취약함의 존엄을 말하다


김혜령 교수

호크마교양대학

2015년 제70차 UN 총회는 세계의 변혁을 위한 17개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를 발표하며 인류의 지속가능성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나는 여기서 하나의 역설을 발견한다. ‘인류’의 지속가능성이란 개별자로서의 ‘개인’의 지속불가능성, 즉 인간의 ‘죽음’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SDGs의 세 번째 목표인 ‘건강과 웰빙(health and well-being)’ 항목은 병을 피할 수 없는 노년의 ‘취약성과 죽음(fragility and dying)’의 안티 테제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소망하는 ‘건강한, 노년’이라는 말의 조합이 지시하는 상태는 죽을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mortal being)에게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며, 가능하더라도 삶의 짧은 순간에만 나타나는 것이다. 평균 수명 110세를 앞둔 이들에게 ‘건강하지 않은 노년’의 시간은 언젠가 오고 만다.

  

김혜령 교수는 본교 기독교학과에서 학사, 석사학위를 받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개신교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죽을 때까지 유쾌하게 - 약해진 자들과 동행하는 삶의 해석학』과 『기독시민교양을 위한 나눔윤리학』, 『레비나스 철학의 맥락들』 (공저), 『한국의 에큐메니컬 신학 - 부산에서 칼스루에까지』 (공저), 『연대하는 여성신학』 (공저) 등을 집필하였고, 기독교 윤리와 인성교육 관련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건강한, 노년’의 판타지가 매일 아침 TV 교양 프로그램이나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 영상에 의해 쉬지 않고 부추겨지면서, 어느새 많은 이들이 ‘건강하지 않은 노년’을 가장 비극적인 상태로 두려워한다. 그중에서 치매는 가장 심각한 노년의 비극이 되었다. 신체에 대한 기초적 통제력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주변인과 가족,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잊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고약하고 불쌍한 질병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치매에 대한 집단적 공포가 창궐한 사회에서는 치매 노인을 보살필 수 있는 사회 제도들에 대한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논의를 펼치기 어렵다. 집단의 공포가 공포 대상자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혐오를 강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취약성에 대한 사회 차별의 결과이자 원인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서, 사회 구성원들에게 “나는 절대 그런 질병에 걸릴 수 없다”라는 강력한 자기 세뇌를 확산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치매 환자를 불쌍하게 바라보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을 공급하는 시혜적 봉사와 제도만이 가능하게 된다. 아무리 국가가 치매안심센터를 늘리고 장기 요양에 필요한 지원을 강화해도, 치매 노년의 삶을 비극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인식이 지속되는 것이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거나 죽이지 못해 사는 삶이라는 집단 인식이 근본부터 변화하지 않는 한, 모든 돌봄 노동과 사회적 제도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허무하거나 무가치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니 치매 치료나 환자 간병 제도를 발전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치매를 바라보는 집단 인식을 바꿔낼 수 있는, 취약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이 필요하다. 5년 전 아버지가 알츠하이머 치매 진단을 받으면서 내게도 집단 인식이 공포로 다가왔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제까지 내가 대학에서 ‘지식’으로 배우고 가르친 신학과 그 접경 학문들이 아버지의 질병과 취약함을 세상의 흔한 시선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해 주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나를 살리는 ‘지혜’가 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지혜: 자아 상실에서도 멈추지 않는 존재 물음 “내가 누구요?”

사람들이 치매를 두려워하는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자기 자신조차 누구인지 잊게 되는 자아 상실의 공포 때문이다. 아버지는 처음에 함께 일했던 사람들을 잊어버리더니, 곧 분가해 사는 아들의 존재를 잊어버렸고, 이내 같이 사는 딸의 이름도 잊어버렸다. 다행히도 자신을 알뜰살뜰 보살피는 아내만은 아직 기억하고 있지만, 자신의 이름도, 직업도 더는 알지 못한다. 아버지는 종종 자기 머리를 쥐어뜯을 만큼 답답해했지만, 자기가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니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는 있는지 알 수 없어 나도 답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 갑자기 말을 건넸다. “내가 누구요? 뭐하는 사람이요?” 너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아버지의 그 괴롭고 답답한 얼굴에서 나는 ‘아직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자’의 존엄을 마주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간절히 묻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야말로 그 어떤 철학자의 존재론적 물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기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안고 던지는 절박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부터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하며 살고 있는가? 오히려 그 확신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으로 던질 수 있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물음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저 ‘군중’ 속에 자신을 매몰하거나, ‘타자’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았는가. 그러한 면에서 나는 치매 투병 과정이 단순히 자아를 상실하여 무의미에 빠진 비극적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답을 알 수 없음에도 끊임없이 자기 존재를 묻는 시간, 즉 최후의 존재론적 물음을 가득 채우는 시간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아버지는 그 이후로 부쩍 “나는 죽는다”, “나 죽었다”와 같은 말들을 반복적으로 내뱉는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가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현존재(Dasein)만이 존재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위대한 철학도 죽음과 삶의 현실적 경계에 서서 자기 존재가 누구인지 괴로워하는 치매 환자 앞에서는 그저 현학적인 지식이 되어 버림을 깨달았다.

성서는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존재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자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것은 치매 환자의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 분리된 모든 인간의 보편적 상황이다. 그러니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인지 기능에 손상을 입었다고 해서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을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과 이웃에 연결된 관계적 존재인 한, 기억은 자기 존재를 스스로 입증하는 개인의 독점적 능력일 수 없다. 기억은 하나님과 이웃이 함께 공유하며 존재의 흔적을 보존하고 기념하는 공동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치매 환자가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 자체만으로 비극이라 할 수 없다. 그를 자신의 배우자이자, 부모이고, 친구이자, 이웃으로 기억하며 존귀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리고 그의 삶 전체를 기억하는 궁극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는 한, 그가 누구인지는 절대 변치 않는다. 비극은 그가 누구였는지를 기억함에도 현재의 쓸모없음을 탓하며 생존 자체에 맞닿아 있는 삶을 비하하는 자들의 몫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간절히 묻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야말로 그 어떤 철학자의 존재론적 물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기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안고 던지는 절박한 질문이었다.

두 번째 지혜: 돌봄 받음을 통해 온전하게 되는 삶의 역설

치매는 신체의 기본적 능력도 앗아간다.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 판단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먹기 위해 필수적인 숟가락질도, 심지어 저작운동도 잊게 만든다. 그러니 밥 한 숟가락도 정성을 다해 떠먹여 주어야 하는 때가 온다. 목욕도 시켜주고 옷도 입혀 줘야 할 때도 금세 온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채우고 갈아줘야 하는 때도 결국에는 오고 만다. 사람들이 치매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갓난아기와 같이 타인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의존적 상태로 퇴화하는 것을 수치심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의존성을 수치심과 동일시하는 사회에서는 치매 환자에게 일어나는 정신적·물리적 폭력을 막기 힘들다. 돌보는 이의 능동성이 돌봄 받는 이의 수동성을 압도하며,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환자의 취약성으로 그를 깔보고 함부로 대해도 되는 마땅한 이유로 왜곡하기 때문이다.

인간 심리 발달 단계를 18세 이전으로 한정했던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달리, 에릭 에릭슨은 청년기와 성인기, 그리고 65세 이상의 노년기를 추가하여 총 여덟 단계의 이론을 정립하였다. 그때 에릭슨의 나이가 50대 후반이었는데, 아직 그 자신도 겪지 않은 65세 이상의 노년기를 가리켜 삶의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지혜’의 단계라 했다. 그러나 그는 90세의 노년을 맞게 되었다. 그의 아내 조앤 에릭슨에 의하면, 더 이상 집필이 가능하지 않았던 에릭슨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신의 책에 많은 것을 끄적여 놓았다고 한다. 나중에 조앤은 그가 남긴 기록을 정리하여 심리 발달 단계를 아홉 단계로 수정한 증보판을 출판한다. 그런데 그들은 일상이 온통 타인의 돌봄에 의존적인 순간으로 채워졌던 90세의 노년기에 ‘온전함(integrity)’이라는 낯선 이름을 붙였다. 타인의 손을 빌리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치스러운 단계를 어떻게 ‘온전함’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조앤은 integrity라는 단어 속 teg는 촉각(tact)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접촉(touch)이라는 말과 뿌리가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접촉 없이는 성장하지 못한다. 사실 접촉이 없다면 생명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독립성이란 착각에 불과하다... 온전함은 이 세상과 온갖 사물들, 특히 사람들과의 접촉을 증진시키는 기능을 한다. 온전함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삶의 방식이며 우리가 추구하고 성취해야 할 고결한 목표이다.” 1)

1)  에릭 에릭슨·조앤 에릭슨, 『인생의 아홉 단계』, 송제훈 옮김, 교양인, 2019, 19쪽. 번역서는 ‘integrity’를 ‘완성’이라고 번역하였다.

병상의 환자를 돌보는 일에는 온몸의 접촉이 필요하다. 소리와 냄새, 시선의 접촉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에릭슨 부부는 자신들이 처한 접촉의 현실을 수치심에 담아내며 자기 존재를 비하하지 않았다. 타인의 부드러운 접촉을 통해 죽을 때까지 생명을 지속하는 자기 존재를 겸손하게 수용하며, 접촉의 손길로 삶의 온전함을 도와주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지혜로운 삶의 해석학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 한 여인이 비싼 향유를 가져와 예수의 머리에 부었다. 제자들은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낫다며 분개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여인의 접촉에 몸을 맡기며 이제 곧 그들을 떠날 자신을 위해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라고 변호하였다. 치매 아버지와 더불어 살며 그를 돌보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많은 일상의 접촉들은 죽음이 그리 멀지 않은 그의 ‘취약한 생명’에 여전히 담겨있는 인간의 존엄함을 드러낸다.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접촉의 수동성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아버지를 통해, 그의 삶도 나의 삶도 세상의 눈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존재의 ‘온전함’에 다가서는 것이다.

혹자는 질병과 죽음의 위험 앞에 취약해진 인간 존재를 달리 이해한들 무엇이 크게 달라질 수 있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늘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초월의 언어인 신학은 그 다른 이해를 통해 효용과 효율의 가치로 인간을 위계 짓는 유물론적 세계관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의 구원을 말한다. 그 구원을 육체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영혼의 문제만으로 축소한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너무 협소하게 만드는 것이다. 취약한 자의 수동성 앞에 어떻게 우리 모두의 적극적 책임을 나눠지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이미 온’ 하나님 나라에서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돌봄의 접촉을 어떻게 함께 만들어 갈 것인가?”라는 우리의 고민은 신학적이면서도, 윤리적이며, 정치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타인의 부드러운 접촉을 통해 죽을 때까지 생명을 지속하는 자기 존재를 겸손하게 수용하며, 접촉의 손길로 삶의 온전함을 도와주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지혜로운 삶의 해석학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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