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s
A Room of
Her Own
여성주의가 미술계의 흐름을 주도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오랜 시간 남성 작가 일변도의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치열하게 작업해온 한국 여성작가들의 정체성과 의식이 봇물 터지듯 표출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여성주의 서사를 적극적으로 작품에 반영하며 미술계를 이끌어온 작가들의 노력만큼이나, 예술 안에서 여성의 이야기를 읽으며 의미를 찾으려는 관람객의 호응이 더해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The Towering of Intelligence
(Hexagonal Tower of Bookshelves)
Features
A Room of
Her Own
The Towering of Intelligence
(Hexagonal Tower of Bookshelves)
미술가의 역할은
‘재현’ 이상의 ‘제언’
여성주의 작가, 강애란 교수
조형예술대학 서양화전공
강애란 교수는 라이팅 북(lighting book)을 매개로 역사 속 여성 인물들과 여성의 삶에 대한 다양한 논의점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오고 있는 대표적인 여성주의 작가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와 근대의 여성으로, 동아시아의 여성에서 세계의 여성으로, 여성사와 여성학 이론에 이르기까지 강애란 교수의 탐구 대상은 지속적으로 확장되어 왔다. 그에게 책은 단순한 사물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이며 시간이다. 책장 속에서 선택을 기다리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발광(發光)하고 발화(發話)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이며, 여기서 특히 인식과 발화의 주체가 여성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작품으로 소환됐다. 2016년 전시 <A Room of Her Own>에서는 20세기 초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습을 물리치고 독자적인 삶의 형태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여성들과 같은 시기에 전쟁과 타의에 의해 희생자로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대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초창기에는 ‘보따리’를 매개로 인생의 희로애락, 특히 여성들의 삶을 생각했다. 물건을 싸는 보따리를 물건이 아닌 생각을 담는 주머니로 상정해 형태나 색으로 ‘메타포’하는 시기를 지나 점차 캐스팅 기법을 통해 보따리를 입체화했다. 재료로 쓴 것은 종이와 알루미늄. 종이는 한없이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캐스팅된 종이는 열 수 없다. 이로써 여성들이 직면한 가부장적 사회, 여성을 비하하는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고자 했다. 알루미늄으로 형상화한 보자기는 세월에 단련되어 강해진 여성들, 엄마와 할머니들을 은유한 것이다. 감정을 넘어 점차 삶과 죽음 같은 실제 관념을 담기 위해 보자기로 책을 싸는 형태의 과도기 작업이 이어졌고, 결국 책이야말로 생각 주머니 그 자체였기에 이후 시기에는 보자기를 훌훌 벗겨내고 ‘책’에 불을 밝히는 라이팅 북 작업이 시작됐다.
Installation View of Revoice, East Asia Feminism:
FANTasia, Seoul Museum of Art, Seoul, Korea
일관되게 책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을 발표해 온 강애란 교수의 작품 세계는 2014년 <책의 근심, 빛의 위안(The Concern of Book, the Consolation of Light)> 전시를 계기로 새로운 분기점을 형성하게 된다. 조선시대와 근대, 현대를 통과한 여성들의 이야기와 정서를 책과 영상을 통해 풀어냈는데,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처럼 진보적인 삶을 살았던 역사적인 여성상을 디지털 조형언어로 표현했을 뿐 아니라, 특히 12명의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기록한 비디오설치 작품과 위안부 배춘희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담은 영상 작업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이 전시는 “작가의 시선이 책의 바깥에 머물지 않고, 이제 책의 내용으로 진입하고서는 마침내 그것을 뚫고 나가버리는 것처럼 보인다”는 평론에서 이야기하듯, 책의 표면보다는 책의 내부와 본질에 더욱 근접해지며 작업의 궤적과 미술가로서의 위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 계기가 됐다.
역사 속에서 체험된 여성의 슬픈 삶을 조심스럽게 다룬 2014년 전시를 계기로 강애란 교수는 더욱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됐고, 여성을 향한 시선은 더욱 확장된다. 2015년 <동아시아 페미니즘: 판타지아>는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인도네시아, 인도 등 유교적 영향 아래 가부장적 전통이라는 유사한 사회문화적 배경을 지닌 동아시아 7개국의 작가들이 함께 모여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을 펼쳐놓았다. 국내뿐 아니라 중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각국의 위안부 여성의 증언을 수집했고, 이를 영상과 미디어 텍스트로 시각화했다. 이 전시는 중국 광둥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 비엔날레에 초청돼 위안부 문제를 세계에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2011 Luminous Poem, Gallery Simon, Seoul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수많은 여성들이 작품으로 소환됐다. 2016년 전시 <A Room of Her Own>에서는 20세기 초 여성에 대한 사회적 관습을 물리치고 독자적인 삶의 형태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여성들과 같은 시기에 전쟁과 타의에 의해 희생자로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 위안부 여성들의 삶을 대조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전시의 제목 ‘A Room of Her Own’은 “여성이 글을 쓰려면 연간 500파운드의 고정적인 소득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A Room of One’s Own’에서 차용했다. 근대의 신여성 화가 나혜석, 문인 김일엽, 무용가 최승희, 음악가 윤심덕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세간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자의’에 따라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타의’에 의해 불행한 인생을 산 위안부 여성들과는 확연하게 대비된다. 더 나아가 이 전시로 조명된 4명의 신여성의 삶에 대한 평가는 강애란의 해석에 의해 완전히 전복된다. 객사 혹은 자살로 삶을 마감한 실패자라는 낙인 대신, 당대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대로 삶을 개척하며 스스로 만족했기에 행복한 여성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애란 교수는 2000년대 초부터 전자 시대 이후 책의 변화와 그 의미에 대해 숙고하며 공감각적으로 확장되는 디지털 책 제작에 전념하고 있다. 빛으로 탈물질화된 조명책은 시각에만 의존하던 인쇄본과 달리 온몸으로 감지하는 공감각적 인지력을 요구한다. 공감각적 반응을 요구하는 전자 매체에 의해 인간 주체는 인쇄 매체에서 붕괴되었던 감각의 다양성을 회복하고 지각 체계의 변화를 경험한다. 디지털 책 프로젝트는 지식의 보고라는 책에 대한 경의이자 동서양 문화사, 지성사, 미술사 서적의 “시뮬레이션” 또는 가상의 책으로 개념화되었다.
여성 인물에 대한 탐구는 페미니즘 이론에까지 심화되며, 2020년 전시 <숙고의 서재>가 탄생했다. 전시장은 세계 각국의 서점에서 다양한 앵글로 촬영한 사진들이 왜곡된 채로 이어지며 거대한 가상의 서재로 연출됐다.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필두로 한 여성학과 페미니즘 고전들, 조지아 오키프, 프리다 칼로, 오노 요코, 야요이 쿠사마 등 예술가로서 삶 속에서 여성에 대한 편견과 맞섰던 이들에 대한 책을 가지런히 꽂거나 혹은 던져져 날아가는 것처럼 진열함으로써 여성문제를 ‘숙고’의 대상으로 제안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여성 인권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의식을 갖고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다. 미술가의 역할은 ‘재현’ 이상의 ‘제언’임을 힘주어 말하며,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여성이 남성에 비해 격하된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을 공유하면서 관객들을 숙고의 장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미술가로서 문헌 속으로 직접 들어가 여성학을 깊이 연구한 강애란 교수는 본교 한국여성연구원 원장(2020-2022)으로 재직하며 기존의 학술포럼과 출판사업 중심의 연구원에 예술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이화여대 우수연구자 지원사업으로 기획한 전시에서 한국 사회에서 치열하게 활동하고 있는 윤석남, 박영숙, 정정엽 등 여성주의 작가들의 작품을 한데 모아 여성주의 메시지를 증폭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조형예술대학장으로서 이화의료원의 보구녀관 복원 프로젝트에 참여해 공간의 복원뿐 아니라 역사 속에 숨겨진 여성 의료인들을 발굴해 라이팅 북으로 작업하는 등 주제의식에 대한 탐구를 끊임없이 지속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역사 속에서 또한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는 여성 인물을 조명하고 여성문제를 환기하는 여성주의 작가로서 작업을 이어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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